[기타] 임진왜란 후 항왜들의 삶

작성자 정보

  • 풀가동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https://etoland.co.kr/link.php?n=9410698 복사






임진왜란때 투항했던 왜군 숫자를 1만명 이상으로 보고 있음.

전쟁 초기에는 투항 항왜들을 죽여 버린 경우도 있었지만. 전쟁중 그들을 조선 정부가 이용하기로 함.


임진왜란 막판 대표적인  전투인 울산성 전투때  조선군 최정예는 아니지만 항왜(투항왜군 부대가) 일등공신이 되기도 함. 

전후



큰 공을 세운 장군급 항왜가 아닌 나머지

항왜들은 조선에 계속 거주하는데 결혼이 힘들자 임난때 고아 조선 소녀들과 결혼해서 후손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그런데 일본에서 살던 문화 그대로 살던 방식 때문에 조선의 사회적  문제가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선 문화에 동화 되어버리죠

다수의 문화에 동화되는건 어쩔수 없는것이겠지만유.


이들의 흔적이 몇년전에 알려짐  광해군시절 역사서에 남겨짐. 울산 지방에 50호 이상의 항왜의 정착지와 기록이 남겨져 있음. x씨로 개명한 기록도.

밀양 청도에도 항왜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림.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때까지 항왜의 기록은 있





그리고


임난 시절  조선에서 도공들이 납치 되었는데  그 후손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도고 시게노리

태평양 전쟁 시절 일본의 외무상으로 유명.(일본인 집안의 양자로 가서 성공)

도공의 후손 박평의 후손인데요

설이지만 시게노리의 증언에 의하면  19세기 초 까지  도공의 후손들은 임난 후 몇백년이 지났지만. 아주 어릴적에는 한국어를 하는 집안사람이 있었다고..(다

이묘들의  노예로 살다보니 메이지 유신 이후 해방됨 ) 너무 고립된 지역에 살아서. 19세기 초까지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일

본에서 도 공들 대우 받 았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인듯. 일본에서 다이묘가 아닌 이상 대우를 받았다는 말 자체가 이해가 안 감. 다 다이묘의 노예들인데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4,467 / 90 페이지
번호
제목
이름